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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後期 白羊寺의 僧役에 대한 고찰=A Study on Monk's Labor of Baekyangsa in Late Chosun Dynasty | ||
| 作者 | 김문경 (著)=Kim, Moon-kyung (au.) |
|---|---|
| 出處題名 | 선문화연구=禪文化硏究=Studies of Seon Culture |
| 卷期 | v.2 n.0 |
| 出版日期 | 2007.06 |
| 頁次 | 80 - 110 |
| 出版者 | 한국불교선리연구원=The Korean Institute of Buddhist Seon |
| 出版者網址 | http://seonli.or.kr/ |
| 出版地 | Seoul, Korea [首爾, 韓國] |
| 資料類型 | 期刊論文=Journal Article |
| 使用語言 | 韓文=Korean |
| 附註項 | 저자정보: 백양사박물관 |
| 關鍵詞 | 백양사=白羊寺=Baekyangsa; 문정왕후=文定王后=the queen of Moon-Jung; 인헌왕후=仁憲王后=the queen of In-Heon; 승역=僧役=monk's labor; 완문=完文; 절목=節目; 왕실원당=王室願堂=a prayer house for a Royal family |
| 摘要 | 白羊寺는 백제 무왕 33년(632) 신라의 異僧 如幻禪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고려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백양사는 高僧大德을 배출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불교 선종의 맥을 유지․계승․발전시켜 왔기에, 백양사는 불교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位相을 차지하고 있다. 14세기 覺眞國師․승려 淸叟의 중창 노력과 여말선초 4차에 걸친 전장법회를 통해 백양사의 寺勢는 보다 융성해졌다. 조선 초 백양사의 寺格은 白嵓寺傳帳受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첫째, 당시 백양사에는 寺院寶가 운영되고 있었으며, 특히 忌日寶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고려시대 사원보는 일종의 殖利機構로서, 사찰의 주요한 재정 기구로 활용되었다. 이는 여말선초 백양사의 경제활동 양상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당시 백양사의 가람규모를 알 수 있다. 백양사의 가람규모는 11세기 中延禪師에 의해 중창되었을 때가 85칸 규모였으며, 태조 2년(1393) 때는 76칸 이상이었다. 이와 같은 백양사의 寺勢는 조선시대 불교정책과 함께 浮沈을 거듭하다가, 1930년대의 백양사는 110칸 규모의 湖南大刹로 자리매김하였다. 조선왕조 정부에서는 승려를 遊休勞動力으로 인식하여, 그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役을 부과하였다. 조선 중․후기 백양사에는 철종 7년(1856)부터 고종 24년(1887)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完文과 節目 등이 발급되어 僧役의 減役 및 免役조치가 내려졌다. 이들 자료를 보면, 백양사가 부담했던 僧役의 實狀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명분으로 僧役 減免의 조치가 내려졌는가를 알 수 있는데, 본고에서는 철종 11년(1860)에 발급된 完文을 중심으로 僧役의 부담과 僧役 減免의 배경 및 추이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당시 백양사가 부담했던 僧役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백양사는 封山願堂으로 지정되어 四山에 禁標가 세워져 僧役과 雜貢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인근 입암산성의 주둔군들이 백양사를 자주 침탈해오자, 完文에 四山의 경계를 명시함으로써, 침탈 금지 조처를 내렸다. 둘째, 3개의 寺下村에서 백양사를 지원해 주었다. 이들 三洞民은 백양사를 수호하고 경제적 지원을 하였으므 로, 이들에 대해 침탈 금지 조치를 내려주었다. 셋째, 백양사에서 부담하였던 雜貢의 실상에 대해 알 수 있다. 백양사는 각 營邑의 校卒과 무뢰배․書院․班常․大芚寺․笠巖山城 守直軍 등으로부터 침탈의 폐해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官用物品으로 비자나무․槐花․松花 그리고 覆盆子를 정기적으로 例納하였다. 가혹한 수탈이라 볼 수도 있는 백양사의 이러한 승역 부담은 여타 사찰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그다지 무거운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백양사는 어떠한 명분으로 僧役의 減役 및 免役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 조선후기 전국의 名山大刹에 王室願堂이 설립되었던 경향에 편승하여, 조선 중․후기 백양사는 왕실원당으로 지정받아 19세기 말까지도 僧役 減免의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즉 문정왕후(1501∼1565)의 명으로 백양사에서 國魂祭가 설행되고, 왕실과 긴밀한 유대관계 속에서 왕실의 후원을 받음으로써 왕실원당에 버금가는 寺勢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인헌왕후(1578∼1626)와의 관련성도 僧役 減免의 명분으로 긴요하게 작용하였다. 인헌왕후는 양란으로 피폐해진 백양사의 중창 불사에 참여하여 雲門庵에 後佛幀과 佛像 조성에 있어 대시주자로 동참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헌왕후의 影幀을 백양사에 봉안하였다. 이후 19세기 말에 이르러 백양사는 흥선대원군(1820∼1898)의 封山願堂으로 지정됨에 따라, 四山에 禁標를 세워 경계를 명확히 하고 침탈 금지 조치를 받게 되었다. 그 외에도 백양사에서는 국가 주도의 國祈祭가 설행됨에 따라 이를 통해 減役 및 免役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Baekyangsa(白羊寺) was established by Saint Yeohwn(如幻禪師) in 632. This temple produced many priestes of virtue from late Koryo dynasty to the present age. Because the Most Reverend Priest Kgkjin(覺眞國師) and monk Chungsu(淸叟) remodeled Baekyangsa in 14th century, this temple was in full flourish. Baekyangsa Museum has Baekamsa-Jeon-Jang-Su(白嵓寺傳帳受) and we can grasp a phases of Baekyangsa in early Chosun dynasty through this book. It is as follows. First, Baekyangsa operated a Temple-treasure(寺院寶). Second, a scale of this temple was over 76 kans. Monk's labor of Baekyangsa was fallen off or discharged in late Chosun Dynasty. The reason is as follows. This temple was appointed a prayer house for a Royal family(王室願堂) in late Chosun Dynasty. So this temple was benefited in the reduction and exemption about monk's labor. For example, the queen of Moon-Jung(文定王后) performed a religious service in this temple. A religious service was called as Kuk-Hon-Jea(國魂祭). The queen of In-Heon(仁憲王后) supported this temple, so Won-Moon-Am(雲門庵) established, a Buddhist painting and an image of Buddha ware made. Moreover, this temple had the portrait of the queen. Therefore Baekyangsa was protected by Chosun government. |
| 目次 | Ⅰ. 머리말 83 Ⅱ. 麗末鮮初 佛敎界와 白羊寺 86 Ⅲ. 白羊寺의 僧役 負擔 91 Ⅳ. 僧役 減免의 背景과 推移 98 Ⅴ. 맺음말 105 |
| ISSN | 1975857X (P); 26715708 (E) |
| 點閱次數 | 69 |
| 建檔日期 | 2022.06.12 |
| 更新日期 | 2022.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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