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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陽 儒林의 表忠祠 守護=The Confucian scholars of Miryang on protecting the Pyochoongsa
作者 이철헌 (著)=Lee, Cheol-heon (au.)
出處題名 한국불교학=韓國佛教學
卷期v.48 n.0
出版日期2007.08
頁次451 - 480
出版者한국불교학회
出版者網址 http://ikabs.org/
出版地Korea [韓國]
資料類型期刊論文=Journal Article
使用語言韓文=Korean
附註項저자정보: 경주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겸임교수
關鍵詞表忠祠=Pyochoongsa; 四溟堂; 惟政=Yujeong; 密陽 儒林; 書院; 海印寺; Confucian scholars; Miryang
摘要승려가 입적을 하면 사리를 모아 그가 생전에 수도하거나 입적한 사찰에 비와 부도를 세우고 영당을 마련하는 것이 佛家의 일반적인 예이다. 四溟堂 惟政의 경우도 그의 비와 부도는 그가 입적한 해인사에 있다. 그러나 그의 진영을 봉안하고 향사를 지내는 表忠祠는 해인사가 아닌 그의 출생지인 밀양에 있다. 이는 유정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국가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의승병을 모아 활약하고, 강화사로 일본에 들어가 두 나라의 화평을 가져온 공적에 대하여 밀양의 유림들이 창의하여 세간의 법에 따른 表忠이라는 서원을 세운 것이다.
유정이 입적한 후 밀양의 유림들은 유정이 생전에 중창한 白霞庵에그의 사당을 지어 향사를 지냈으나 병자호란으로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1714년 지역 유림의 건의에 의해 밀양부사 감창석이 1721년에 표충사를 중창하고 관에서 제수를 받아 춘추로 향사를 하였다. 이후 유정의 법손인 南鵬은 조정 대신들의 지원을 받아 유정의 난중일기인 『奮忠紓難錄』을 발간하고 영당비를 세우는 등 유정의 업적을 기리는 대규모의 추모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에 해인사에서는 유정이 입적한 후부터 향사를 지내왔다며 밀양에서의 영당비 건립을 반대하고 유정의 서원을 해인사로 이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조정에서 서원의 疊設을 조사하고 첩설처를 훼철하라는 지시에 의해 밀양의 표충사와 해인사의 영당 중 어느 한 곳은 훼철될 위기에 처한 때문이었다. 해인사에서는 승려는 출생지보다 출가한 사찰이나 입적한 사찰이 소중하게 여기며, 해인사에 유정의 비와 부도가 있고, 유정이 입적한 이후로 제사를 지내온 것이 밀양 표충사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밀양 유림들의 강력한 반대로 해인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1741년에 해인사의 사원은 훼철되고 표충사는 밀양에 남게 된 것이다.
이는 해인사와 표충사 사이에 移建 분쟁이 있을 때마다 밀양 지역의 유림들이 이를 저지하기위해 士林狀을 府使에게 올리고, 僧道會에 通文을 올려 승도들을 설득하는 등 표충사의 수호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해인사가 佛家의 전통에 따라 승려로서의 유정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왔다면, 밀양의 表忠祠는 유가의 전통에 따라 호국충신으로서의 유정을 기리며 관에서 제수를 받아 춘추로 향사하였다. 그리고 해인사는 승려들에 의해 세워진 영당이라면 밀양의 表忠祠는 지역의 유림들이 창의하여 民·官·僧이 합심하여 세운 祠院이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사회분위기에서 佛家의 전통을 내세우는 해인사보다는 유가의 전통을 계승하여온 밀양에 表忠祠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Generally, a monk’s tomb, gravestone and memorial hall were constructed at the temple he studied or died. And his followings respected his memory there every year. The memorial halls for Yujeong participated in the Hideyoshi’s invasion of Korea were constructed at the tample Haeinsa and Miryang mooanmyon.
In the Joseon Danasty, Confucian scholars disregarded monks, because monks were not dutiful to parents and did not render devoted service to the King. But they liked Yujeong in spite of monk, because he collected monks and joined in war to rescue the nation and the people.
The Youngjadang of the tample Haeinsa was constructed by only monks, but the Pyochoongsa of Miryang mooanmyon was done by Confucian scholars and monks.
As the government prohibited to memory the same man at other places, one of the two memorial halls should be removed. Monks of the tample Haeinsa insisted that they had memoried Yujeong since 1607, but monks of the Pyochoongsa had memoried since 1739. Confucian scholars and monks of Miryang disputed about them. After all the memorial hall for Yujeong in the tample Haeinsa was removed by the King Youngjo’s order in 1741. Then monks of the tample Haeinsa claimed to move the Pyochoongsa from Miryang mooanmyon to the tample Haeinsa. But their claims were dispersed by Confucian scholars’ resistance of Miryang.
The memorial halls for Yujeong in the tample Haeinsa was constructed by only monks, but that in Miryang was constructed by Confucian scholars and monks. Monks of the tample Haeinsa performed a Buddhist rite, but Confucian scholars and monks of the Pyochoongsa performed a Confucian rite.
The former regarded Yujeong as a priest of high virtue, but the latter regarded him as a loyal vassal.
Finally what the Pyochoongsa was located in Miryang was caused by the Confucian scholars’ efforts and supports.
目次Ⅰ. 들어가는 글 454
Ⅱ. 表忠祠를 세우고 享祀 455
Ⅲ. 表忠祠의 건립을 건의 461
Ⅳ. 표충사 확장과 영당비 건립에 협조 464
Ⅴ. 表忠祠의 해인사 移建을 저지 467
Ⅵ. 表忠祠의 해인사 移建을 재차 저지 471
Ⅶ. 맺는 말 476
ISSN12250945 (P)
點閱次數236
建檔日期2021.12.01
更新日期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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